Chapter 25
안일했다.
조금만 더 생각했으면 되는 문제였는데.
릴리스와의 데이트가 너무 행복한 나머지 주변의 시선을 제대로 알아채지 못했다.
이미 일간신문에 박혔으면 끝난 거다.
아카데미 신문부는 사생활은 1도 신경쓰지 않아 수많은 원성을 자아내는 곳이지만, 정보의 정확성과 신뢰성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심지어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사진 아래로 이어진 글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교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아카데미 재학생? 혹은 졸업생?
…교복 입고 나갔었지…?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아카데미 교복은 딸려있는 여러 효과들 덕분에 아무나한테 지급되지는 않았다.
오로지 아카데미 재학생과 졸업생들만이 교복을 입을 수 있었다.
총장님의 도난방지마법 때문에 빼돌리지도 못하는 귀중한 옷이다.
그런데 그걸 입고 당당하게 데이트를 해댔으니….
나 자신의 멍청함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서! 이 여자는 누구야? 여자친구?!”
여기서 나는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한방에 이 의혹을 잠식시킬 수 있으며 또한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닌 방법.
‘가족이라고 말한다면….’
좀 친한 남매라고 포장한다면 뭐, 팔짱도 끼고 간접키스도 서슴없이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게 최선이었다. 이 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으리라 직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힐끔 내 오른팔을 흘겨보았다.
-꽈악!
피가 안 통할 정도로 팔을 움켜쥐고 있는 릴리스.
눈에서 빨간 빛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여기서 만약 가족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릴리스의 가슴에 말뚝을 박는 것이나 다름없다.
기껏 일주일이라는 기간을 잡아 마음을 정리하겠다고 선포한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결국 결단을 내려야 했다.
“아….”
“아?”
릴리스의 손아귀에 힘이 더욱 들어간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있는 힘껏 팔을 뽑아내었다.
레티가 내 행동에 어리둥절한 시선을 보내왔고, 릴리스는….. 진심으로 상처 받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내 행동은 끝나지 않았다.
뽑아낸 팔을 그대로 릴리스의 허리에 두르고 잡아당겨, 릴리스의 쇄골에, 내가 도장을 찍은 그곳에 뺨을 가져다 대었다.
“아직…. 사귀지는 않아.”
“!!!!”
“!!!!”
레티와 릴리스. 두 여자가 모두 경악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이윽고 비슷했던 두 표정은 엇갈리기 시작했다.
레티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반대로 릴리스의 얼굴은 환하게 펴지고 있었다.
“너….너 그말은….”
레티가 더듬더듬 말을 내놓았다.
“…어, 언젠가는 사귄다는…?”
말 끝을 흐린 레티를 향해.
“…아마 그러지 않을까?”
그러자 레티는 입을 딱 벌리며 그대로 굳어버렸으며 릴리스는 환호성과 함께 나를 꽈악 끌어안았다.
애써 릴리스의 목덜미 너머로 레티를 향해 인사한 나는 굳어있는 레티를 지나 기숙사로 향했다.
복도를 걸으며 주변을 살피자 역시나 사람들이 나를 힐끔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닐 거라는 걸 알지만, 그것이 내게 달라붙어 있는 릴리스를 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조금 더 빨라진 걸음으로 기숙사에 도착한 나는 곧장…
“아서!!”
릴리스에게 덮쳐졌다.
“자, 잠깐만요!”
“평생 행복하게 해줄게~”
“릴리스!!”
일주일 참아 준다면서요!
—-
“…솔직히 그건 이미 고백아냐?”
“……”
아니라곤 말 못했다. 누가 봐도 그건 고백이었지…
다만.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이에 나를 살짝 째려보는 릴리스.
“…어쩌다가 이런 목석 같은 인간을 좋아하게 되어선…”
목석 같아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갑자기 다가온 릴리스가 내 뺨에 입을 맞춘다.
“쪽…. 그런 너여서 더 좋아할 지도?”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거… 일주일 다 안 쓸 수도 있겠다. 내 쪽에서 못 참겠는데?
분명 처음 만났을 때는 성숙하고 요염한 분위기의 숙녀였건만… 이제는 완전히 요염이 업그레이드 된 요망함과 귀여움까지 장착된 매력덩어리가 되버렸다.
‘사랑을 하는 여자는 소녀가 된다더니. 이게 외신한테도 적용되는 말일 줄이야…’
돌이켜보면 이런 릴리스의 변화는 날이 갈수록 빠르게 진행 된 것 같았다.
릴리스의 말마따나 매 초마다 나를 향한 감정이 커져간다는 것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리라.
그리고 나 또한, 이런 릴리스의 행동에 영향을 받아 그저께보다 어제, 어제보다 오늘이 더욱 릴리스가 좋아진 것 같다.
이런 마음이 임계점을 넘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 날이 D-day가 될 것이다.
—-
루이스 골드 썬은 누군가 보면 으스러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이빨을 뿌드득 갈고 있었다.
손에 들린 것은 작은 신문 한장.
그 일면에 커다랗게 찍혀 있는 한 커플의 사진을 본 루이스는 입술을 짖씹었다.
“빌어먹을…!”
사진 속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남자, 아서를 향해 저주를 퍼붓던 루이스는 다시 찾아오는 격통에 화장실로 뛰어갔다.
-푸드득…푸득….
“으아아아아!!”
자기 자신은 이렇게 고통받고 있건만, 정작 이런 고통을 준 원흉은 희희낙락하게 여자와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그것도 루이스가 여태껏 보았던 모든 귀족 영애들을 압살할 미모의 여성과.
꽉 문 입술에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를 수준으로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루이스는 변기 위에서 몸부림쳤다.
‘좆같은 트롤 새끼 주제에!!’
이러다간 정말 화병이 나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루이스는 애써 화를 억눌렀다.
화장실에서 나온 루이스는 회복마법을 받고는 산책을 하기로 결심했다.
산책이라도 하며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릴 심산이었다.
옷을 챙겨입은 루이스는 찬바람을 느끼며 공원을 정처없이 돌아다녔다.
확실히 찬기운이 돌자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낀 루이스는 종종 산책을 나오기로 결심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하늘이 슬슬 어두워지는 것을 본 루이스는 기숙사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멍하니 걸어가던 그때.
“…음?”
루이스는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무언가를 놓고 온 듯한 찝찝한 감각에 눈이 절로 찌푸려진다.
순간 화장실에서 뒷처리를 깜빡했나 싶어 화들짝 놀라며 바지 뒤쪽을 매만졌으나 다행히도 그건 아니었다.
사라지지 않는 기시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아가던 루이스는 어느새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는지 까먹게 되었다.
“…어디로 가야하지?”
주변을 둘러봤지만 사방은 깊은 어둠에 잠겨있었다.
분명 어두워질 때까지 시간이 남았을 거라 생각했던 루이스는 당황하며 주문을 외웠다.
마법으로 불덩이를 만들려고 했던 루이스지만.
“마법이 안 돼?!”
주문을 외웠음에도 손바닥 위에는 불덩이는 커녕 작은 불씨도 보이지 않았다.
그 기이한 현상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 루이스는 무의식적으로 뒤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그때.
“좋은 저녁입니다.”
“우와악!!”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화들짝 놀란 루이스가 뒤를 돌아봤으나 그의 뒤에는 다른 방향과 마찬가지로 깊은 어둠만이 존재했다.
“누, 누구야!”
“두려워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을 도와주고 싶어하는 사람입니다.”
목소리는 사방에서 들리는 듯 방향을 특정할 수가 없었다.
“네가 뭔데 나를 도우니 마니 하고 있어!”
“후후후. 그거야 당신도 잘 알고 있을 텐데요?”
목소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챈 루이스가 얼굴을 붉혔다.
“닥쳐! 네가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여!”
그러자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핫. 저는 모든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것을 알고 있지요. 이를테면…. 당신에게 저주를 건 존재의 정체가 무엇인지 라던가?”
“…뭐?”
“궁금하신가요?”
순간 혹했던 루이스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그딴 건 궁금하지 않아.”
“아아, 그랬죠. 당신은 지금 궁금한 게 아니야…. 당신은 지금-”
그 직후 루이스는 자신의 뒷편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거칠게 돌아선 루이스는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기다란 형체에 놀라 엉덩방아를 찢었다.
그런 루이스에게 상체를 굽히는 누군가. 그리고 이어지는 소름끼치는 목소리.
“복수를 원하고 있지.”
순간 번개가 친 것처럼 빛이 번쩍이며 아주 잠깐 어둠이 그 속을 보였다.
루이스는 똑똑히 보았다.
대머리의 까만 피부를 가진 남자. 하지만 눈동자만큼 파랬다.
기괴함을 자아내는 그 모습에 루이스는 그와 멀어지기 위해 발버둥쳤다.
“이런 이런 제 모습에 놀라셨나요? 이 모습이 마음에 안 든다면야… 다른 모습도 있긴 합니다만.”
다시금 빛이 번쩍이자 보이는 모습은 기괴할 정도로 부풀어 있는 여성의 몸체였다. 어둠에 휩싸여 몸통 외에 다른 부위는 보지 못했지만 그 몸통부터가 인간이라고 보기는 힘든 형체였다.
“음… 이것도 마음에 안 드시나요?”
이어서 빛이 번쩍 일때마다 그는 모습을 바꾸었다. 성별, 형태, 심지어 종족마저 바뀌고 있건만 그의 목소리는 항상 동일했다. 그 불일치에서 나오는 기괴함에 루이스는 헛구역질을 했다.
“우욱…우웨에에엑…”
하지만 먹어서 제대로 흡수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아하하하! 위액만 나오는 군요. 그것참 힘드시겠습니다.”
“커헉….컥…원하는 게….. 뭐야.”
“아니죠 아니죠. 제가 원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이 원하는 게 뭔지를 아는 게 중요하죠.”
“뭐야..?”
어둠을 뚫고 시체처럼 창백한 손이 내밀어진다.
“말해드렸지 않나요? 당신은 복수가 하고 싶습니다.”
루이스는 내밀어진 손을 쳐낸다.
“헛소리하지마. 내 마음을 네가 어떻게 알아?”
“비록 제가 우주에서 가장 무지한 분을 섬기고 있긴 하지만 아는 것은 매우 많답니다. 특히 당신의 마음은 제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이어진 목소리는 다시 사방에서 들려왔다.
“억울하지 않습니까?”
“분노가 치밀지 않습니까?”
“고작 평민 주제에.”
“마법도 제대로 못 쓰는 버러지 주제에.”
“트롤 새끼 주제에.”
목소리는 점점 루이스 본인의 목소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루이스는 어느새 그 말이 자신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너… 뭐야?”
“제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가 당신을 도와줄 것이라는 사실이죠.”
다시금 루이스의 눈앞에 손이 드밀어진다.
“잡으시겠습니까?”
“……”
그 창백한 손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괴함을 느끼게 만들었지만.
루이스는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꼈다.
-덥썩
루이스는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믿기로 했다.
자신을 망가뜨린 그 망할 트롤에게 복수할 수 있다면, 그는 악마와도 계약하리라.
“후후후…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내가 뭘 하면 되지?”
“아아, 너무 성급하면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내일 아침. 이 자리에 다시 나오시면 해야할 일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럼 그때까지….. 아, 꿈에서 계단은 내려가지 마시죠.”
“…뭐? 그게 무슨 말-”
마지막 말에 대해 묻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루이스는….
“…어?”
자신이 공원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늘은 아직 해가 뿜어내는 노을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 장면은 그가 어둠속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보았던 풍경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 Slider main contain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