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08
몸이 천천히 풀리듯 가벼워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나를 떠받치는 것만 같다.
그러나 허공의 부유함은 잠시였고, 발끝이 다시 땅을 찾는다.
인간은 결국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존재인가보다.
훕훕-
“히끅, 깜짝이야.”
스피커에서 공기소리와 함께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우리 비행기는 지금 댈러스-포트워스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춘 후 좌석벨트 표시등이 꺼질 때까지 자리에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창밖으로는 텍사스의 평화로운 아침 풍경이 펼쳐진다.
꾸욱-
나는 밤 중에 따뜻하게 데워진 두 볼을 차가운 창문으로 식혔다.
“끄으으으. 왜 순간이동 마법 같은 건 없는 거지.”
기지개를 쭉 켜니 티셔츠가 배꼽 위로 말려 올라갔다.
똑똑-
“네, 나가요!”
나는 팔을 황급히 내리고 캐리어를 들고 내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편안한 비행 되셨나요?”
“좋은 아침이에요. 오랜 비행 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기장님, 부기장님.”
“짐이 있으신 것 같은데,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 히끅…!”
“음?”
“후읍, 죄송해요, 갑자기 딸꾹질이.”
나는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하, 갈까요?”
“후우. 네에.”
FBO를 통해서 신속하게 출입국 절차를 마친 뒤, 무인택시를 잡아 병원으로 이동했다.
알랭의 병문안 선물로는 약과랑 홍삼 세트를 줄 예정이었다.
“히끅.”
K 디저트 중에서는 가장 호불호가 없는 간식이기도 하니까.
“히끅.”
홍삼도 일부러 쓰지 않고 달달한 것으로 준비했다.
“히끅! 히끅! 아우 왜 안 멈추는데! 히끅!”
나는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갈비뼈에 그대로 전해지는 통증.
‘언젠간 멈추겠지. 너무 신경쓰지 말자.’
* * *
겨우 딸꾹질을 진정시키고 도착한 입원실.
“안녕하세요 베이가 선수. 얼마 전 수술하셨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침대에 누워있는 소년이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노나메 마도사…? 아아… 다쳐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히끅…”
나는 소년의 손을 살짝 잡아주었다.
전신깁스를 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절로 숙연해진다.
“온몸에 화상을 입으신 건가요?”
“네에… 폭발 때문에. 그래도 오러를 잘 둘러서 경미한 화상이라고. 의사가 그러네요.”
LPG 탱크로리와의 추돌사고로 사거리를 뒤덮는 대폭발이 일었다고 한다.
훈련이 끝났을 땐 오러도 별로 안 남아있을 텐데.
그 사고 속에서 동승자까지 용케 잘 살아남았다.
“마음이 많이 심란하셨을 텐데. 히끅. 지금은 회복하는 데에만 집중하세요.”
“죄송합니다… 국가교류전 열심히 준비하셨을 텐데.”
“그리고 여기 약과랑 마시는 홍삼 가져왔거든요? 나중에 출출할 때 먹어보세요.”
국가교류전 참가자라고 한들, 이제 겨우 열여섯 살밖에 안 된 소년이다.
체구도 작은 탓에 그의 어린 나이가 더욱 부각되었다.
한창 피가 끓는 청소년에게 어떤 위로를 해야 가장 마음에 와닿을지 고민을 하다가.
“원래는 알랭 베이가씨를 16강에 보내는 걸 목표로 세웠어요.”
“16강인가요… 정말 높긴 하네요.”
“하지만 올해 국가교류전은 그냥 베이가 선수가 우승한 걸로 생각할래요.”
“네? 어째서?”
“함께 차를 탔던 동승자를 구하셨다면서요? 자신의 오러를 나누어주면서까지. 그건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위기 상황 속의 정확한 판단력과 신속한 대처. 64명의 참가자 중 당신이 단연코 최고일 겁니다. 히끅.”
소년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히끅. 그러니까 제 마음대로 우승자를 단정짓는 걸 허락해줄 거죠? 히끅…!”
“푸하.”
“왜 웃어요?”
“그냥요. 딸꾹질 때문에 웃기잖아요.”
“이거 오늘 아침부터 안 멈추고 있어요. 저 좀 살려주세요. 히끅!”
베이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팔을 부르르 떤다.
“아으윽! 잠시만, 웃었더니 배, 배가!”
“아무튼 잘 치료하시길 바라고. 비록 국가교류전은 아쉽게 됐지만, 내년에 마도대련 시합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이왕이면 1군 경기에서.”
“후우… 아마 어렵겠지만,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남자가 그러면 못 써요. 히끅. 눈 앞에 보이는 건 다 깨부순다는 마인드로 히끅.”
“하하하하.”
어찌저찌 병문안을 마치고 병원을 나왔다.
이놈의 딸꾹질은 벌써 한 시간째 이어지고 있었다.
차라리 정상적인 ‘딸꾹’ 소리라면 신경이 덜 쓰였겠지만.
“히끅! 후우…”
4옥타브 라에서 5옥타브 레 사이의 민망한 신음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중대한 선택과 갈등의 기로에 놓였다.
‘오늘은 그냥 호텔 가서 쉴까? 드리밍 모드를 쓰면 조금 나아질 수도 있는데. 아니 그렇다고 딸꾹질 때문에 관광을 포기해? 그것도 좀 이상하잖아.’
그래, 내가 비행기를 몇 시간을 타고 왔는데.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일단 도심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점심을 먹기에는 약간 이른 시각.
오랜만에 사람 사는 구경이나 해보려고 SNS에 접속하니 곧바로 메시지 하나가 날아왔다.
[▶서유나: 우왕 나메 접속 중이닷 ㅎㅎ]
[노나메: 안눙]
[▶서유나: 뭐햐 안 자고?]
[노나메: 나 지금 미국이야. 점심 먹기 전에 길거리 돌아다니고 있어.]
[▶서유나: 우와 미국! (초롱초롱)]
“흐흥 귀여워.”
서유나도 최근에 친구 따라 SNS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올린 게시물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엔비 포토카드, 친구들과 찍은 인생네컷, 비 내리는 날 도로 위의 개구리.
내가 하트를 눌러주자 곧바로 답장이 왔다.
[▶서유나: 하뜌 고마웡 ㅎㅎ]
[노나메: 맞다 유나야.]
[▶서유나: ㅇㅇㅇㅇ?]
[노나메: 딸꾹질 멈추는 법 알아?]
[▶서유나: 딸꾹질이 안 멈춰?]
[노나메: 엉. 힘들어 죽겠어.]
[▶서유나: 나는 얼음이나 단 거 먹으면 빨리 그치던뎅.]
[노나메: 접수완료.]
“흐힝 맛있겠다 히끅!”
젤라또 아이스크림 가게로 달려가서 장미모양 망고콘을 주문했다.
할짝할짝-
입안에 퍼지는 달콤함에 사르르 녹는 기분.
“아 맞다. 사진도 찍어야지.”
나는 셀카를 찍어서 유나에게 전송해주었다.
[▶서유나: 우와아아아 맛있겠다!!!! ฅ(՞៸៸> ᗜ < ៸៸՞)ฅ (모자도 너무 귀여워!)]
[노나메: 너무 맛있고]
[▶서유나: 딸꾹질은 나아졌어?]
[노나메: 아니 하나두 ㅎ]
[▶서유나: ㅠㅠ]
그래도 기분은 좋아졌다.
‘아이스크림으로 점심을 때우면 어떡하니!’라고 하는 천교수의 잔소리가 아른거리지만.
유나의 조언을 들으려면 정말 어쩔 수 없었다.
해가 쨍쨍 나는 한여름의 날씨.
“얘야. 혹시 길을 잃은 거니? 부모님은?”
“그런 거 아니에요. 이거 얼마예요? 히끅.”
유나가 딸꾹질을 멈출 방안을 생각해내는 동안, 나는 싸구려 선글라스를 구매했다.
평일 대낮에 어린 소녀가 홀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으니 수상쩍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지만.
그 이상의 관심을 보이는 사람 또한 없었다.
[▶서유나: 내가 인터넷에 열심히 찾아봤는데.]
[노나메: 응응.]
[▶서유나: 귀를 파거나, 손가락 입에 넣어서 구역질을 하면 된다는데?]
[노나메: 그 방법도 한번 시도해볼게.]
슬슬 아이스크림의 냉기 쿨타임이 끝나가는 시점.
“흐읏.”
나는 그늘진 벽에 기대어 새끼 손가락을 귓구멍에 살살 넣어보았다.
“히끅.”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첫 번째 방법은 실패.
그 다음에는 구역질을 하라는 거였지?
일단 입안의 침을 모아 꿀꺽 삼키고.
브에에-
천천히 입술을 벌리려는데.
“저 사람 멈춰요! 제 가방을 가져갔어요! 야 이 개같은 소매치기야 멈추라고! 아무나 도와주세요!”
“히끅?”
킥보드를 타고 위험천만하게 인도 위를 질주하는 사람이 보였다.
그 뒤를 열심히 뒤쫓는 커플 한 쌍.
아이쿠, 여자쪽이 넘어졌다.
나는 일단 다중오러, 특히 중(重)의 오러를 하복부에 두고 강하게 회전시켰다.
그리고 타이밍을 잘 보고 있다가.
‘지금!’
소매치기범이 등에 멘 루이비통백을 허공에서 낚아챘다.
쿠당탕탕-!
“크아아아악!”
남성의 몸뚱이도 함께 딸려오길래 일단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일단 커플들이 올 때까지 남성의 등을 무릎으로 찍어 눌렀다.
“놔! 놓으라고! 으아아아!”
“히끅…! 움직이지 마세요. 다칩니다. 히끅.”
남성이 등 뒤로 손을 휘둘러보지만, 눈 먼 주먹은 내 얼굴을 가볍게 스칠 뿐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진짜 구역질 하면 딸꾹질이 멈추나?’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이론이다.
하지만 황당할수록 뭔가 일리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두 손가락을 입 안에 집어넣어 천천히 혀 안쪽을 긁어냈다.
탓-
갑자기 내 옆구리를 주먹으로 찌르는 소매치기범.
“우웁! 콜록콜록콜록! 케흑 케흐헥! 콜록! 하악, 하아아, 흐에에에에… 야, 죽는 줄 알았잖아!”
심장이 벌렁벌렁 뛴다.
눈이 충혈되다 못해 눈물이 핑 돌았다.
“우욱, 콜록콜록콜록… 어? 멈췄나?”
“얘야 괜찮니?”
“위험하게시리 달리는 킥보드를 붙잡아버리면 어떡해!”
아까 내 맞은 편에서 이야기를 하던 문신을 한 건장한 남성 무리.
그들이 다가와 소매치기범의 팔을 한쪽씩 붙들고 내 안위를 살폈다.
나는 촉촉해진 눈을 팔로 대충 비비고 괜찮다는 손짓을 건넸다.
“콜록… 하아하아… 괜찮아여 헤헤.”
멈췄다, 딸꾹질이 멈췄다!
서유나 너는 정말 신이야?
“괜찮아? 주먹에 맞은 것 같은데.”
“얘 좀 봐. 눈이 새빨개.”
“정말 용감한 일을 했어. 울지 마렴.”
“난 안 때렸어!”
“넌 닥치고 있어! 도둑놈의 새끼가 하다하다 어린이를 때려?”
“이게 확 그냥! 뒷골목이었으면 넌 뒤졌어.”
“전 정말 괜찮은데… 콜록…”
목이 조금 따끔따끔하긴 하지만 딸꾹질이 주는 불편함에 비하면 새발의 피니까.
“고맙습니다! 그리고 죄송해요! 어떻게 괜찮으세요? 많이 안 다쳤어요?”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 모이기 시작했다.
나는 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쓰고 얼굴을 마주보는 걸 피했다.
“너 혹시 노네임 아니야?”
“잘못 보셨어요! 아니 잘 보셨는데 내 말은… 여기서는 조금 곤란하니까 빨리 가볼게요.”
“잠깐만!”
나는 짐을 챙기고 후다닥 현장에서 달아났다.
[노나메: 유나야 대성공이야!]
[▶서유나: 야호! 😆😆😆]
이제 딸꾹질로 눈치 안 보고 ‘세상의 모든 원소 연성진 박물관’을 갈 수 있게 됐다.